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버트 공 (문단 편집) === [[국서]]로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rince Albert_1843.jpg|width=100%]]}}} || 200년만의 '여왕의 [[부군]]'[*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의 왕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부군보다는 타국 군주에 더 가까웠고, [[엘리자베스 1세]]는 아예 결혼을 안 했으며,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는 아내보다 서열에서 밀리긴 할지언정 영국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공동 즉위를 할 수 있었다.]으로서 여러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고생이 심했다. 앨버트 이전에 [[앤 여왕]]의 부군으로 [[덴마크]]의 왕자였던 [[덴마크의 조지|컴벌랜드 공작 조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앨버트와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앤 여왕에게 살아있는 후계자를 만들어주는데도 실패하면서 [[공기]]급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데다[* 명색이 여왕의 정식 남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사망했을 때 장례식조차 개인장으로 치러버렸다. 이런 푸대접과는 별개로 아내 [[앤 여왕]]과의 금슬은 좋았고, 남편의 사후 앤 여왕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아내가 여왕이 된 지 6년 만에 사망한 탓에 별다른 선례가 없었기 때문. 또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꽤 고독했다고 한다. 숙부 [[레오폴드 1세]]가 빅토리아 이전에 영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와 결혼해 벼락출세를 노린다는 험담을 들은 것처럼, 그도 여왕의 재산을 탐하고 여왕을 조종해 영국을 지배하면서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나자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라고 앨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대유행을 했을 정도.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데도 앨버트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결혼 후 17년 뒤인 1857년에야 간신히 '여왕의 배우자(The Prince Consort)' 칭호를 받았으며, 그 전에는 원래의 호칭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of Saxony[* 작센 공작 직위는 모든 [[베틴 가문]]에게 주어지는데 원래 영지 분할상속을 포기하고 장자 상속으로 전환했음에도 예전 특권을 명목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앨버트 공은 작센 [[공작(작위)|공작]]이면서 작센 가문의 [[프린스]]이기도 하다.]'에 직계 왕족과 결혼하면 무조건 붙는 HRH(His Royal Highness)이 추가로 붙은 것 외에 어떤 영국의 작위나 공적 지위도 없었다.[* 왕이 아니면서 여왕의 부군이 된 또 다른 케이스인 [[앤 여왕]]의 부군 조지와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각각 컴벌랜드 공작, 에든버러 공작이라는 영국 작위를 받았다. 다만 'The Prince Consort'라는 호칭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왕의 배우자'라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역대 영국 여왕의 부군들 중 이 호칭을 부여받은 인물이 오직 앨버트 1명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호칭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조차 'The Prince Philip'일 뿐, 'The Prince Consort' 칭호는 죽을 때까지 받지 못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원래 앨버트 공에게 'King Consort' 호칭을 주고 싶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패한 이후, 의회와의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남편에게 국서라는 뜻의 'The Prince Consort' 호칭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군 제독 지위도 주고 싶어했지만, 이 지위는 기어이 못 받았다.[* 대신에 [[영국 육군]] 원수 계급은 받았다.][* 후계자가 아닌 남성 왕족들은 군인으로 빠지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대임에도 앨버트 공은 군대 경력이 없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외국 출신 군 미필에게 명예직일망정 제독 지위를 안겨준다는 것은 몹시 타협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도 사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은 그리스 왕족이긴 했어도 영국 해군사관학교 출신에 영국 해군 장교로 2차대전 참전용사이며, 현역일 때 중령까지 진급했기에 원수직을 받는 것에 큰 반발이 없었다. 미필 외국인에게 원수 자리를 준 육군이야...세계 최강이 아니라서 여왕에게 대들지 못한 모양이기에는 영국육군의 정식 명칭은 브리티시 아미이다. 왕을 처형한 권력자가 만든 [[철기대|아이언사이드]]를 뿌리로 하다보니, 오히려 왕당파다운 행동을 한 것이 영국육군이란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만 상술한 [[덴마크의 조지|컴벌랜드 공작 조지]]는 육해군 총사령관 자리를 받은 걸 생각하면 안습.(…)] 거기다 앨버트는 성격이나 성향도 [[영국인]]들과는 별로 맞지 않았다. 농담을 즐기고 재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앨버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앨버트는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던 데다[* 결혼 후 1년이 지나고서도 본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친구라고는 코부르크에서부터 함께 온 시종과 애완견밖에 없다고 적었다.] 밤늦게까지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춤추며 노는 영국 상류층들의 관습[*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꼽혔던 베드포드 공작부인([[버트런드 러셀]]의 큰할머니)은 새벽 4시까지 즐거운 나이트 라이프를 실컷 즐기고 다음 날 낮 11시에 일어나는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요리]]의 전 세계 적인 '''악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식사와 함께 쿠키, 케이크가 곁들여지는 애프터눈 티는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티타임|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문화]]가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애프터눈 티가 간식이라기보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아점]]용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은 아예 이해를 못 하다 못해 경멸해서 성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것처럼[* 명색이 왕실 하녀인 만큼 하층민 출신들은 아니었지만 사용인들을 하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것과 앨버트처럼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귀족 여성을 대하듯 칼같이 예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 모자를 벗고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정중하게 행동했고, 당시 상류층 남성이라면 흔히 두었던 정부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데다 [[임신]]해서 몹시 살찌고 예민해져 있는 아내 [[빅토리아 여왕]]을 보고[* 원래부터 키가 작고 뚱뚱했던 빅토리아는 [[임신]]을 하면 "술통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더더욱 살이 쪘고, 성격 또한 원래의 급함에 더해 몹시 까칠해지곤 했다. 특히 앨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냈다고. 자리를 옮기고 싶을 때마다 앨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번쩍 들고 옮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안 그래도 빅토리아 여왕이 정신줄을 놓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주치의들은 여왕의 성격이 임신할 때마다 위험 수준으로 괴팍해지자, 어느 정도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후계 구도가 든든해진 뒤에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던 앨버트와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앨버트의 말이라면 일단 따랐던 빅토리아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 "미래의 어머니가 될 [[임산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아내"라고 부르며 옆에서 아주 충실하게 수발을 들어주었다. 19세기 영국인의 기준에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앨버트의 행실과 마인드는 존경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왠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다 못해 좀 재수없게까지 느껴지는 오버액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밤새도록 술 퍼마시다 동트면 잠드는 집단 속에 성실남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결혼 초부터 약간 어둡고 우울하며 금욕적이던 그의 성격은 죽을 때까지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어서 영국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다.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며 심심할 때마다 까이곤 했다. 앨버트 공의 도덕률에 깊이 공감했던 데다 열렬한 남편의 지지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영국 신민들에게 평가절하 당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